십몇 년 동안 카메라를 꽤 여러 대 거쳤는데 오래 곁에 둔 것도 있고 몇 달 만에 보낸 것도 있다. 오랜만에 정리도 할겸 예전 사진들을 꺼내보았다.

소니 NEX-3
2011년 1월에 떠날 유럽 배낭여행을 앞두고 그 전해인 2010년에 SONY 최초의 미러리스인 NEX-3를 샀다.
원래는 SONY의 DSLT를 사려고 했는데 NEX를 보고 나서 마음이 바뀌었다. 부피는 이렇게 작은데 렌즈를 바꿔 낄 수 있다는 점이 눈에 확 들어왔기 때문이다. 미러리스라는 형식 자체는 2008년 파나소닉 G1이 먼저였지만 내가 처음 만난 건 이 카메라였고 이건 여행을 위한 카메라다 싶었다.
그렇게 배낭여행을 다녀왔고 그 뒤로는 거의 꺼내지 않았다. 카메라는 있었는데 사진이 취미는 아니었다.

리코 GR
2015년쯤이었다. 얼리어답터 기질이 있어서 새로 나온 전자제품이나 기기를 써보는 걸 좋아했고 그런 물건을 구할 때마다 사진으로 기록을 남겨두곤 했는데 그 시절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은 화질이 늘 아쉬웠다.
여러 카메라들을 검색한 끝에 리코 GR을 선택했다.
사실 후지필름 X100S와 끝까지 저울질했는데 크기가 주머니에 들어가고 렌즈도 일체형이라 GR이 나한테 더 맞겠다 싶었다.
결정적이었던 건 주머니 속에 쏙 들어가는 크기와 포지티브 필름이다. 리코 GR에 들어 있는 이미지 효과 이름인데 발색과 명암 대비가 강해져서 필름으로 찍은 것 같은 색이 나온다.
돌아보면 그게 시작이었다. 제품을 찍으려고 산 카메라로 제품이 아닌 걸 찍기 시작했으니까.
X100S에서 “뷰파인더”에 꽂혔다
GR을 사면서 접어뒀던 X100S가 계속 궁금해서 결국 중고로 들였다. GR과 같은 똑딱이 포지션에 렌즈가 고정된 것까지 같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광학식 뷰파인더.
후지의 X100 시리즈는 하이브리드 뷰파인더라는 걸 쓴다. 역갈릴레오식 광학 뷰파인더에 촬영 정보를 겹쳐 보여주다가 앞쪽 레버를 젖히면 전자식으로 바뀌는 방식이라 렌즈를 통과한 상을 보는 게 아니라 창으로 바깥을 직접 보면서 프레임만 얹어 보게 된다.
GR에는 뷰파인더가 없어서 액정을 보고 찍는데 X100S를 쓰면서 눈을 대고 작은 창으로 세상을 보는 경험을 처음 했고 그때부터 뷰파인더로 보는 세상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화각도 달라졌다. GR은 환산 28mm인데 X100S는 실초점거리 23mm에 환산 35mm라 같은 똑딱이라도 프레임에 담기는 범위가 꽤 다르다.
이때부터 화각에 따라 프레이밍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나에게 편한 화각은 무엇인지를 찾기 시작했던 것 같다.

렌즈교환식이 궁금해서 X-T1을 샀다
뷰파인더에 재미를 붙이고 나니 렌즈교환식이 궁금해졌다. 그런데 캐논이나 니콘은 알아보지도 않았다.
남들이 많이 하는 평범한 선택을 거부하는 기질이 좀 있어서 바로 후지필름 X-T1을 중고로 샀다. 성능을 비교해서 고른 게 아니라 후지를 쓰고 싶어서 후지 안에서 골랐다.
그 사이에 스쳐간 것들
GR을 매일 들고 다니다 보니 역시 뷰파인더가 고파져서 X100T를 서브로 들였다. 한번은 X100S 블랙을 다시 사기도 했는데 처음 산 X100S는 실버였고 향수가 돋아서 색만 다른 같은 모델을 또 산 거다. 오래 쓰지는 않고 좋은 분에게 입양 보냈다.
소니 A7에서 풀프레임을 처음 봤다
후지만 쓰겠다던 사람이 풀프레임이 궁금해져서 넘어갔고 후속 모델이 나오면서 값이 내려간 초대 A7을 저렴하게 데려왔다.
그때까지 내 카메라는 대부분 크롭바디였는데 확실히 다르긴 달랐고 밤에 찍어도 크롭바디보다 노이즈가 적은 게 특히 놀라웠다.

여기서 생긴 풀프레임 미련이 나중에 라이카 Q로 이어진다.
10년째 쓰고 있는 X-Pro2
X-T1을 팔고 X-Pro2로 옮긴 게 2016년이었고 이것도 상태 좋은 중고를 노렸다.
X100 시리즈에서 좋아했던 그 하이브리드 뷰파인더가 렌즈교환식 바디에 들어간 게 X-Pro2다. 광학 창으로 바깥을 보면서 렌즈까지 바꿔 낄 수 있으니 레인지파인더 카메라를 쓰는 기분이 났다. 정확히는 흉내에 가깝지만 그 흉내가 좋았다.
X-T1에 비하면 AF 속도도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좋아졌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데 이 목록에서 가장 오래 곁에 있는 렌즈교환식 카메라다. 물론 X-Pro4가 나온다면 기변할 의사는 있다.
언제나 함께하는 GR2
2016년 겨울에 리코 GR2를 샀다. 실버 에디션이었다.
메인이 렌즈교환식으로 넘어가면서 매일 들고 다닐 수 있는 카메라가 따로 필요해졌다. X100 시리즈와 GR을 둘 다 써봤으니 비교는 이미 끝나 있었고 GR2가 가장 작고 화질도 충분했으며 무엇보다 포지티브 필름이 있었다.
매일 들 카메라로 뷰파인더 달린 걸 찾아다녔는데 결국 뷰파인더 없는 쪽으로 돌아온 셈이다.
AF는 요즘 카메라와 비교하면 한참 느리다. 그런데도 아직 서브바디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작년에는 이 카메라가 여행 하나를 통째로 감당한 적도 있다. 도쿄에 가면서 M10을 탁자 위에 꺼내뒀다가 짐을 급하게 싸느라 그대로 두고 나온 거다. 가방에 GR2가 들어 있어서 다행이었고 매일 들고 다니려고 산 카메라가 정말 그렇게 쓰인 셈이다.
필요할 때 곁에 있는 카메라가 최고의 카메라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는데 GR2를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M 시리즈로 가는 발판이었던 라이카 Q
M10 직전에는 라이카 Q를 썼는데 렌즈가 고정된 풀프레임 카메라고 자동초점도 된다.
오래 쓰지는 못했다. 이 카메라를 들고 여행을 한두 번 다녀온 정도인데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결과물이 정말 좋았다.
보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무게인데 생각보다 무거워서 손이 덜 갔다.
다른 하나가 더 컸는데 Q를 쓰면서도 라이카를 쓴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라이카 로고가 달린 파나소닉 카메라를 쓰는 기분이었다.
결국 M10을 샀다
사진을 취미로 하다 보면 라이카 로망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 로망의 끝은 결국 M이라는 생각이 계속 남아 있었다.
이중합치 뷰파인더도 궁금했는데 두 개의 상을 겹쳐서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라 소위 말하는 진짜 RF 뷰파인더가 어떤 건지 직접 써보고 싶었다. X-Pro2에서 흉내로 만족하던 걸 진짜로 바꾸고 싶었던 셈이다.
문제는 필름이었다. 필름값도 값이지만 현상하고 스캔하는 데 드는 시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디지털 M을 알아봤는데 앞선 바디들은 저마다 발목을 잡는 구석이 있었다. 특히 M9는 CCD 센서 커버글라스가 부식되는 문제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그렇게 하나씩 걸러내고 나니 내 기준을 다 만족하는 건 M10이라는 결론이 나왔고 그대로 질러버렸다.
결국 원했던 건 근본이었다. 오랫동안 드림 카메라였던 M10을 손에 넣고 싶은 마음도 컸다.
지금은 이렇게 쓴다
여행을 갈 때는 GR2를 가방에 넣고 렌즈교환식을 하나 더 챙긴다. 여행의 큰 목적 중 하나가 출사라서 렌즈를 바꿔 낄 수 있는 카메라는 무조건 들고 간다.
처음에 유럽 가려고 산 카메라는 여행이 끝나자 서랍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여행을 가려고 카메라를 챙긴다. 순서가 뒤집혔다.


